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식 중화 요리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식 중화 요리는 초기만 해도 정착한 [[화교/대한민국|화교]]들 다수가 [[산둥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둥 요리|산둥성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만주족]] 요리의 영향이 강한 [[만주 요리]]의 영향도 받았는지 만주 요리인 [[물만두]]나 [[군만두]]와 같은 요리가 나오기도 한다.[* 참고로 동북3성 요리도 [[몽골 요리]], [[한국 요리]], [[러시아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 [[러시아]] 요리의 경우 근현대 시기 이 지역에 조선인, 러시아인들이 몰려와 살던 영향을 받았다.][[https://news.mt.co.kr/mtview.php?no=2010100720178136722&type=1|#]] [[대한민국|한국]]에 정착한 [[화교/대한민국|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근대 들어 [[대한민국|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대한민국|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 등이 시작이다. 다른 화교들도 그렇지만 이들은 음식점 사업, 건설 노동자로 유입되었다. 이들이 초기 주로 활동했던 곳은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알려진 [[인천광역시|인천]] 월미도 근처의 [[차이나타운(인천)|조계지]]였으며, [[쿨리]] 노동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가 점차 고급화하여 부유한 [[한국인]]과 [[일본인]]들까지 상대하는 음식점이 성행하게 된다. 그래서 이 때는 [[청나라]] 음식이라고 청요리라고도 했는데, [[화교/대한민국|화교]] 인구가 많았던 [[서울특별시|서울]]이나 [[부산광역시|부산]]에도 유명한 청요릿집이 몇 군데 있었다. 당대 [[대한민국/사회|한국 사회]]에서 청요리집이 차지하는 위상은 [[염상섭]]의 소설 <[[삼대(소설)|삼대]]>를 봐도 알 수 있다. 조상훈이 친구들을 불러모아 집에서 몰래 마작판을 벌이면서 청요리집에서 요리와 함께 [[빼갈]]을 배달시키고, 이 마작 모임에서 시중을 드느라 쉬지도 못하는 집안의 하인들이 '하다못해 요리라도 좀 남아있으면 기름진 청요리 맛이나 보는 재미로 참을 텐데 걸신 들린 것처럼 접시를 싹싹 비우니 힘들기만 하고 좋은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1930년대]] 한국에서 청요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맛보기 힘든 별미였고, 청요리집은 손님들에게 비싼 접대를 하는 고급 레스토랑과 같았다. 또한 대도시의 청요릿집은 사업과 정치의 장이 되기도 했다. 홀이 아닌 방이 따로 있어 비밀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코스 요리를 시키면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논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래된 중국집에 가면 10명 내외의 소그룹이 식사를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별도의 룸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있다. 현대에도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 중국집이 있고 이런 방은 대가족 식사나 직장인 회식 용도로 예약을 잡는 경우가 많다.[* [[요정]] 정치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 당시에는 한국의 서비스업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뭔가 모의하기 위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접객업소가 별로 다양하지 못했다. 비싼 접객업소로는 [[궁중요리]] 등 전통적인 [[한국 요리|한국 고급 요리]]와 술, 여성 접대원이 나오는 요정 정도가 있고, 하급공무원이나 젊은이 등 그보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갈 만한 접객 업소로는 [[중국집|중국 요리집]] 정도가 당시의 대중적인 접객업소였던 것.] 또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 을 보더라도, [[6.25 전쟁|한국전쟁]] 직후 가난했던 시절로서는 드물게 호사스러웠던 주인공의 결혼식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 청요릿집을 빌려 벌인 피로연과 기름진 청요리를 양껏 먹는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이다. 한국식 중국 요리가 끈적하고 진하고 기름진 맛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 역시, 20세기 초 중반 그나마 서민도 종종 즐길 수 있는 호사의 상징 중 하나가 [[중국 요리]]였던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며 [[일본/문화|일본 문화]]의 영향도 제법 받았다. 일단 [[우동]], [[짬뽕]]이란 단어부터가 일본식 발음[* 짬뽕의 원류를 중국 산동성의 '초마면'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기존 각주의 설명대로 초마면이 짬뽕의 중국어 명칭이므로 이로 바꾸는 언어 순화 운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는 모순이 있다. 왜냐면 일부 [[화교/대한민국|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에서는 이미 초마면이라는 하얀 국물의 중화요리집의 '우동'에 가까운 메뉴를 파는 곳이 있는 데다, 지금의 짬뽕과는 전혀 다른 요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생각할 순 없기 때문.]이고, 밑반찬으로 [[단무지]]와 [[양파]]가 포함된 것과 그 양파를 과거엔 '다마네기'라고 꽤 불렀던 것도 이러한 영향의 일부분이다. [[이쑤시개]]를 '요지'로, [[요리사]]를 '이다바'[* 실제 일본 발음은 '이타바'(いたば)]로 불렀던 것 등도 마찬가지다. 아예 일본어가 섞인 [[야끼만두]], [[볶음짬뽕|야끼우동]][* 일본의 야끼교자나 [[야키우동]]과는 다른 요리. [[대구광역시|대구]]의 한 가게에서 개발되었다. 21세기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으로 오면서 '[[볶음짬뽕]]'이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명칭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 요리를 개발한 사장도 일본식 어감 때문에 메뉴명을 바꿀까 고심하기도 했다고 했었다.]이라는 표현도 있다. 당시엔 고급 요리였던 청요리집에 자주 방문할 수 있었던 계층은 부유한 일본인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영합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다 [[광복]] 이후 중국 [[국공내전]]이 종식되면서 많은 [[화교/대한민국|화교]]들이 [[대만|본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화교/대한민국|화교]]들도 화교 탄압 정책과 맞물려 생활고를 겪자 대부분 요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때 한국식 [[춘장]]이나 현대적인 한국식 중화 요리 메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6.25 전쟁|한국 전쟁]] 이후 서방 원조로 밀가루가 대중화되고 이후 정부가 혼분식 장려 정책을 추진한 것 등과 맞물려 화교가 운영하던 중국집들도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화교/대한민국|화교]] 대다수가 중국집 사장일 정도였다. 그렇게 [[중국집]]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점차 화교가 아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들도 많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다양한 한국식 중화 요리가 개발되고 맛도 점점 한국식으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조선족]] 유입 등으로 이전에는 없었던 [[양꼬치]], [[마라탕]] 등으로 대표되는 [[만주 요리]]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현지화되지 않은 외국 요리[* 가령 [[베트남 요리]], [[태국 요리]],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등이 201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났다.]를 파는 식당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본토 [[산동 요리]]나 [[광동 요리|홍콩 요리]] 등 한국식 중화 요리와는 또 다른 [[중국 요리]]를 선보이는 중식당도 한국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중식당들도 10~20년간 한국 손님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전 세대의 중국집과 마찬가지로 재료와 요리법에서 은근한 현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2010년대 이후로는 [[미국식 중화 요리]], [[일본식 중화 요리]]도 한국에 들어오는 상황이다 보니 한국식 중화 요리는 향후 많이 바뀔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